기억의 봉인

6화. 기억의 궤도 위에서

CtrlCraft 2025. 4. 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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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봉인] - 5화. 봉인 밖으로 흘러나온 것들

 

[6화. 기억의 궤도 위에서]

The Seal of Memory — Ep.06 Key Art

 

진우는 노트를 펼칠 때마다 손끝이 저릿했고,
페이지마다 묻은 듯한 그림자들이 그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마치 과거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이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야...”

진우는 벽에 기대앉아 노트 첫 장을 다시 펼쳤다.
종이 위에는 정갈한 손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관측은 반복된다. 그러나 반복은 동일하지 않다.
이계는 기억의 흐름에 따라 형태를 바꾼다.
기억을 보는 자는 흐름을 읽고, 흐름에 따라 길을 결정짓는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의 뇌리 깊숙한 곳에서 어딘가 딸깍 하고 스위치 하나가 켜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진우는 서윤과 함께 청동의 눈 임시 거점으로 향했다.
장소는 을지로 지하 쇼핑센터의 폐쇄구역,
지도에도 남아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곳은 3년 전 두 번째 틈이 열렸던 장소야.
다행히 그땐 관측자가 없어서 겨우 봉인했지만, 다시 약해지고 있어.”

진우는 낡은 철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쪽은 물비린내와 먼지로 가득했고,
낡은 간판들과 흉내뿐인 마네킹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쇼윈도.

그들 앞에는 깨진 유리 바닥 아래로,
은은한 빛이 스며나오는 작은 봉인진이 깔려 있었다.
푸른 빛이 팔딱이며, 마치 생명체처럼 살아 있었다.

“이건... 심장이 뛰는 것 같아.”

진우의 말에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살아 있는 에너지야.
어떤 기억이 틈을 만들고, 어떤 기억은 세상을 바꾸지.
지금 이건, 잊힌 기억이 아니라 ‘지워진 기억’이야.”

진우는 노트를 펼쳤다.
노트의 한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며,
봉인진과 동일한 문양이 떠올랐다.

『관측자의 각성 조건 – 동일한 패턴의 기억이 세 번 관측될 때, 경계가 열린다.』

진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 번... 고시원, 폐역, 그리고 이곳.”

 

순간, 바닥에서 공명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마네킹들이 삐걱거리며 몸을 틀기 시작했고,
바람도 없는데 낡은 간판이 흔들렸다.

“열리고 있어. 틈이.”

서윤은 주술진을 빠르게 그리며 외웠다.
진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노트를 품에 안았다.

그의 눈에 익숙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다시 고시원 복도, 그리고 민혁의 이름, 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이번엔,
그 틈 너머에서 누군가가 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진우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지만,
틈은 이미 그의 발 아래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계는 그를 향해 열리고 있었고,
이번엔 그가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관측자 모드 진입... 기록 개시.”

노트의 표지가 스스로 열리며,
무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다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관측자는,
그 궤도 위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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