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면]

기차는 정차하지 않았다.
폐역의 어둠 속을 통과하는 그림자, 그건 오래전에 잊혀졌어야 했던 '기억'의 잔해였다.
진우는 전동차 안에 서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딘가 어긋난 시간 속, 그는 창밖으로 흐릿한 플랫폼을 응시했다.
노란 조명 아래, 의자 하나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소년이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낡은 교복, 긁힌 무릎,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입술.
진우는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민혁...?”
그 순간,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기에서 짧은 정적이 흘렀고, 곧바로 플랫폼 전체가 서서히 일렁였다.
마치 물속처럼, 현실이 흔들리고 있었다.
소년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잔상이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
그는 진우를 바라보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진우의 입술이 떨렸다.
플랫폼 뒤편, 닫혀 있던 출입문들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진 그 문들 사이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공간 자체가 찢어지고 있었다.
“뭐지... 이건...”
진우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발이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공기가 꺼져가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플랫폼 가장자리, 열려 있는 검은 문 사이로 무수한 손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때.
“그만!!”
쾅! 하고 울리는 폭음과 함께, 형광등이 번쩍였다.
공간이 뒤틀렸다.
진우는 정신없이 몸을 움츠렸다.
그 앞에 선 것은, 한서윤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엔 베인 자국이 있었고,
그 피를 종이부적에 떨어뜨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고조되더니, 이내 모든 것이 빠르게 수축되며 닫혔다.
검은 틈은 붕괴했고, 출입문들은 다시 굳게 닫혔다.
소년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진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가쁘게 이어졌다.
손은 떨리고 있었고, 귀에는 여전히 ‘그 소리’가 맴돌았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서윤은 말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우는 그 손을 잡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무슨... 일이었죠...?”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은, 힘이에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면, 그 틈이 열린다.
기억과 이계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진우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아 있었다.
냄새, 기운, 그리고... 그 소년의 표정.
“그 애는... 날 아는 것 같았어요.”
“알죠.
왜냐하면 그 아이도 이 도시에 ‘남겨진’ 자니까.”
서윤은 잠시 말을 멈추고, 부적 하나를 찢어냈다.
타오르며 사라지는 종이조각은 묘하게 쓸쓸했다.
“이젠,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이 기억들을 계속 외면할 건지,
아니면... 끝까지 따라갈 건지.”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어렴풋한 빛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손길처럼.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음엔 더 깊은 ‘문’이 열린다는 것을.
'기억의 봉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화. 기억의 궤도 위에서 (0) | 2025.04.21 |
|---|---|
| 5화. 봉인 밖으로 흘러나온 것들 (0) | 2025.04.20 |
| 3화. 청동의 눈 (0) | 2025.04.20 |
| 2화. 죽은 공간의 소리 (0) | 2025.04.19 |
| 1화. 유령은 도시에서 먼저 일어난다 (0) | 2025.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