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봉인

5화. 봉인 밖으로 흘러나온 것들

CtrlCraft 2025. 4. 2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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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봉인] - 4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면

 

[5화. 봉인 밖으로 흘러나온 것들]

The Seal of Memory — Ep.05 Key Art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도 아니었다.

진우는 자신이 걷고 있는 바닥이 낡은 나무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몇 초가 걸렸다.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 창호지에 새겨진 햇살 무늬,
그리고 불규칙하게 울리는 시계의 '똑딱' 소리.

그는 어느 오래된 한옥 안에 서 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주위를 둘러봤다.
복도는 길고 정적에 잠겨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병풍이 펼쳐져 있었고,
벽 너머에서는 가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스쳤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그는 어딘가에 이끌리듯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복도 끝의 작은 마루 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눈동자는 짙은 검은색.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공허함도, 그리움도 아닌, 명확한 인식.

“당신, 또 왔네요. 그때 그 사람이잖아요.”

진우는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너... 나 알아?”

“모르진 않죠.
당신은 항상 기억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너를 본 적 없어.”

“하지만 난 당신을 기억해요.”

 

말끝이 떨어지자,
복도 뒤편에서 무언가 기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둠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진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고.
이곳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흘러가는 기억의 틈’이라는 것을.

그 순간, 마루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눈부신 빛이 한줄기, 진우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정신이 급격하게 뒤틀리는 기분.

 

다음 순간, 그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고시원. 자신의 방 침대 위.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킨 그는 즉시 손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까 그 아이가 건넨 노트가 그대로 있었다.

“...진짜야. 이건 꿈이 아니었어.”

노트는 검은 가죽으로 싸여 있었고,
표지 한가운데에는 청동색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히.

그는 곧바로 일어나 책상 위 전등을 켰다.
노트를 펼치자,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억이란, 남는 것이 아니라 새겨지는 것이다.
그 자리에,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던 기억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폐역에서 만난 민혁, 손끝의 빛, 그 아이가 했던 말.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기억이 틈을 넘어 세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진우는 노트를 품에 안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서울. 어둡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의 눈엔 보였다.
멀리, 주택가 건물 사이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
그것은 틈의 기운이었다.

그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도시는 잊었지만, 나는 기억할 거야.”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건 누군가가 새로운 문을 열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진우는 그 문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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