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는 틈 속 기억과 마주하며 관측자로 각성하고,
이서연의 경고를 통해 ‘기억의 봉인’이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서울 전역에 퍼지는 이상 반응 속,
그는 결단한다.

"그날의 틈, 기억나?"
진우는 폐가를 나와 돌아가는 길,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도, 누구의 대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억이라는 무게가 마음 한편에서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날 틈 속에서 마주한 것들.
희미한 잔향과 익숙한 감각.
그리고 자신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기억.
“…내가 왜 그걸 보고 있었을까?”
가로등 불빛 아래 진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머릿속에선 틈 속에서 들려온 소리들이 되풀이되었다.
똑딱. 똑딱.
낡은 시계의 초침 소리.
그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
청동의 눈 본부에 도착하자, 진우는 곧바로 기록실에 들렀다.
감지판엔 여전히 붉은 선들이 떠 있었다.
“서울 시내 전역에서 틈 반응이 동시다발적으로 감지됐습니다.
성북, 은평, 마포… 심지어 강동까지.”
보고 요원의 목소리엔 예민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서윤의 방으로 향했다.
서윤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았지?”
“…응. 그 틈, 안쪽에서.”
진우는 짧게 대답하며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기억이 반응하고 있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어.”
“기억이 살아있다는 건, 이제 틈이 단순한 균열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건 연결이자 침입이고… 때로는 의지로 작동하기도 해.”
진우는 불쑥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이서연 선배… 그가 남긴 기억, 혹시 틈의 안쪽과 연결된 일종의 관문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있어.”
서윤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해. 넌 유일하게 그 기억과 접속했잖아.
그건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어. 네 안에서 무언가 반응한 거야.”
진우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선 감각이, 계속해서 가슴 한편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
그날 밤, 진우는 지하 보관소로 향했다.
이서연의 마지막 영상 기록.
단말기 속에서 재생된 화면은 오래된 캠코더로 찍힌 듯한 거친 화질이었지만,
음성은 또렷했다.
『…기억은 흘러.
흐르는 건 언젠가 넘치게 되어 있어.
틈은 그 기억을 삼켜왔지만, 이제 되돌려주고 있어.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라진 게 아니야. 숨은 거지.』
카메라 속의 이서연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우. 이걸 네가 보고 있다면, 그건 이미 시작됐다는 뜻이야.
넌 내 뒤를 잇게 될 거고, 나는 그 문턱에서 사라질 거야.
묻지 마. 왜였는지를. 그냥… 닫아. 반드시 닫아야 해.』
―
진우는 말없이 단말기를 덮었다.
그의 손이 가슴팍에 닿자, 문양이 다시 뜨겁게 일렁였다.
“닫아야 해… 뭘?”
스스로 던진 질문은 대답 없이 허공에 흩어졌고,
그는 그 질문을 껴안은 채 지하실을 나섰다.
―
다음 날, 청동의 눈 내부 긴급 회의.
"이건 단순한 틈 이상입니다.
기억 전파 반응이 도시 전역으로 확장 중입니다.
일부 지역에선 감정 간섭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어요."
"관측자 후보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진우 혼자로는 부족할 수도 있어요."
“아닙니다.”
서윤이 단호하게 반박했다.
“진우 외에는 없습니다.
이 흐름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라 변화예요.
틈이 ‘관측자’를 선택한 거예요.”
“그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각성도 완료되지 않았고, 봉인의 본질도…”
“하지만 그는 견뎠어요.
틈 안에서. 기억을 품고 나왔고,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예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회의장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문 너머, 진우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그날 밤, 본부 옥상.
도시의 불빛이 검은 하늘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 아래로, 흐릿한 선 하나.
틈이 현실을 침식하며 그려낸 경계선이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그 안에서, 여러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날 폐가의 틈 속.
죽어 있던 기억.
그리고 자신에게 속삭이던 낯선 목소리.
『기억은, 너를 데려갈 거야. 그때가 오면 묻지 마. 닫아.』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기억은… 선택의 문제야.”
목 아래의 문양이 다시금 달아올랐고,
그 열기는 이제 공기까지 진동시키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이상 반응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7곳에서 동시에 감지된 틈의 떨림.
진우는 눈을 떴다.
“이제… 시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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