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틈 너머의 진실]

성산로 폐창고지대.
한때 물류센터였던 공간은 지금은 버려진 철제 구조물과 벗겨진 콘크리트 벽만이 남아 있었다.
바람조차 들지 않는 고요 속에서 진우는 서 있었다.
그의 앞, 미세한 진동과 함께 공기가 일그러지며 틈이 형성되고 있었다.
봉인 없는 틈.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서윤은 결계를 설치하며 낮게 속삭였다.
“이번 틈은 이전과 달라요. 이건 누군가가 ‘연 것’ 같아요.”
“자발적으로요?”
“네.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진우는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틈을 통과하자, 공간이 뒤집혔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사방은 빛과 어둠이 얽힌 감각의 층으로 채워졌다.
여기는 **‘기억의 중간계’**였다.
여기서 시간은 선형으로 흐르지 않는다.
진우는 발을 디딜 때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존재하지 않은 미래의 파편들을 마주쳤다.
그가 도착한 중심부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낡은 한옥, 마당을 감싸는 대나무 숲,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소녀.
소녀는 등을 돌린 채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우는 천천히 다가갔다.
“...이서연?”
소녀가 돌아섰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피로와 따스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드디어 왔네요. 진우 씨.”
“당신은... 진짜 이서연?”
“여긴 제 기억이에요. 동시에 당신의 일부이기도 하죠.”
진우는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처럼 보였지만,
말투와 시선은 현실처럼 또렷했다.
“당신은 틈 너머로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하지만 저는 선택했어요. 기억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걸요.”
이서연은 노트를 내밀었다.
진우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노트의 페이지가 혼자서 넘겨졌다.
『기억을 기록하는 자는, 때로 그 안에 갇힌다.』
“기억은 때때로 현실보다 강해요.
특히 외면한 기억일수록.”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어요?”
“누군가는 이걸 기록해야 했으니까요.
잊혀진 도시의 기억, 봉인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당신.”
진우는 숨을 멈췄다.
“저를... 알고 있었어요?”
“기억 속에서 당신은 반복됐어요.
마치 내가 지워버린 이름이 다시 떠오르듯이.”
이서연은 진우의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
“이제 당신이 관측자예요. 그리고 기록자죠. 나 대신.”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틈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돌아가세요. 아직은 끝이 아니에요.”
“당신은요?”
“전 이미 여기 있어요.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요.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진우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틈 바깥. 폐창고로 돌아온 진우는
무릎을 꿇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윤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진우는 아무 말 없이 노트를 펼쳤다.
새로운 문양 하나가 더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억은 전염된다.
기억한 자는, 그 기억을 이어야 한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어깨에는 여전히 무게가 있었지만,
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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