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봉인

11화. 도시의 틈

CtrlCraft 2025. 4. 2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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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는 자가 된 진우는 서울 전역에 확산되는 기억의 틈을 목격한다. 또 다른 관측자의 존재 가능성과 함께, 그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기억을 선택하는 자’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진우는 서윤과 함께 성산로의 폐창고를 벗어나, 청동의 눈 거점으로 복귀했다.

지하 복도로 이어지는 회색 벽면은 무표정했고,
천장의 형광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며 어딘가 불길한 리듬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노트가 들려 있었다.
이전보다 더 무거워진 감각.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기록된 책임이 부여된 무게였다.

“이제부터 당신은 ‘기록을 이은 자’예요.”

서윤은 그의 앞을 걸으며 말했다.
진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무게는 이제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운명의 일부였다.

청동의 눈 내부 전략실.
벽면 전체에 연결된 모니터에는 서울의 주요 틈 반응 지도가 떠 있었다.

곳곳에 깜빡이는 붉은 점들이 도시 위를 덮고 있었고,
진우는 그것이 단순한 디지털 정보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기억의 반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건...”

진우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선 그동안 관측했던 기억의 단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붉은색 점이 늘어나고 있었다.
도시 전역에 걸쳐 다수의 틈이 동시다발적으로 ‘예열’되고 있었다.

서윤은 손짓으로 화면을 조정했다.
각 틈의 좌표와 감지된 기억 유형들이 스크롤처럼 펼쳐졌다.

“기억 전염 현상이 시작된 거예요.
당신의 기록 이후, 이계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어요.”

“그 말은, 제가 무언가를 열어버린 건가요?”

“아니요. 당신은 촉발자였을 뿐이에요.
이건... 이미 예정된 순환이에요.”

진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 자체로 ‘기억’을 품고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마치 그 기억들이 하나둘씩 틈 사이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첫 파동처럼 느껴졌다.

이건 봉인도, 우연도 아니었다.
일종의 '회복 반응'이었다.

“당신이 관측한 틈 안에서, 기억의 일부가 이탈한 흔적이 있어요.”

서윤이 노트를 넘겨보며 말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했다.

“기억이... 빠져나갔다고요?”

“네. 그리고 그걸 누군가 받아낸 흔적도 있어요.
마치 제3자 기록자처럼.”

진우는 놀랐다.
노트는 철저히 관측자 본인에게만 반응하는 기기였다.
그런데 그 기록을 누군가 ‘공유’했다?

“혹시, 또 다른 관측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엔 분명한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그 관측자는 당신과 달리,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 있을지도 몰라요.”

“같은 기록자인데, 다른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위험하죠.
특히 틈의 주도권이 흔들리면, 도시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진우는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기록하는 자는 곧 세계의 균형을 조정하는 자이기도 했다.
의도적인 개입이 시작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개조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노트를 바라보았다.
페이지 가장자리에서 빛이 일렁였다.
마치 다음 장면을 예고하는 듯한 느낌.

그날 밤, 진우는 홀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 옥상에 섰다.

아래로는 불빛의 강이 흐르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고,
야식 배달을 기다렸으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나 진우는 보였다.
그 틈들 사이사이로 번져가는 희미한 기억의 안개.
서울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

그는 노트를 꺼내 펼쳤다.
새로운 페이지가 자동으로 생성되며, 문장이 떠올랐다.

『도시는 기억을 품는다. 기억은 틈을 만든다. 틈은 사람을 바꾼다.』

그는 펜을 꺼내 처음으로 자신의 문장을 직접 써넣었다.
펜촉이 종이를 누르는 느낌은 단단했고, 묵직했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지켜보는 자가 아닌,
기억을 선택하는 자가 되기로 했다.』

그 순간,
서울 남부 지역의 전광판 하나가 동시에 꺼지며,
검은 파장이 도시 한복판에 일렁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그 순간,
틈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진우의 손에서 노트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경고가 아니라, 신호였다.

“…시작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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