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외곽 편의점에서 야간 근무 중이던 진우는
정체불명의 노인과 마주한 뒤,
현실과 이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묘한 사건을 겪게 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묘하다.
잠들지 않는 불빛의 물결 아래, 누군가는 외로움을 버텨내고,
또 누군가는 기억에 눌려 흐느낀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잊혀야 할 것이 고개를 든다.
한진우, 24세.
평범한 대학 휴학생이자, 편의점 야간 알바생.
그의 하루는 조용하고 지루하게 흘러간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한 구석, 성북구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
이곳은 도시의 빛과 소음에서 살짝 비껴간 자리였다.
그러나 진우는 그 틈이 오히려 좋았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이곳이, 오히려 편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02:12AM. 진우는 계산대 뒤편에 앉아 컵라면을 젓고 있었다.
점장이 몰래 주워온 한정판 피규어 옆에 놓인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90년대 발라드가 흐르고 있었고,
진우는 졸음을 견디며 컵라면의 면발이 퍼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또 이 시간이네... 진짜 유령이라도 나올 기세야.”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라면을 들려던 그때.
딩동.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노인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깊게 팬 주름, 해묵은 외투, 새카맣게 그을린 손.
무엇보다 눈동자가 이상했다. 흐릿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빛을 반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우는 습관처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노인은 진열대를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계산대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구겨진 전단지가 쥐어져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레 물었다.
“뭐, 찾으시는 거라도...?”
노인은 대답 대신 진우를 바라보았다.
아주 깊은, 어딘가 슬픈 눈으로.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긴 아직... 기억하고 있구먼.”
“네?”
노인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어라. 곧, 틈이 열린다.”
순간, 진우는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노인의 말투는 어딘가 기묘했고,
그의 목소리는 오래된 테이프를 거꾸로 돌린 듯 이상하게 왜곡되어 들렸다.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노인은 다시 자동문을 통해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는 여느 때처럼 똑같았지만,
진우는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빠르게 계산대의 모니터를 조작해 CCTV를 돌려봤다.
출입 시간대를 확인하려 했지만, 놀랍게도 화면은 비어 있었다.
정확히 노인이 들어왔어야 할 그 시간대,
영상은 끊긴 듯 회색의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진우는 화면을 반복해서 돌려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삭제라도 한 것처럼,
노인의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 가게 안의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빡거렸다.
진우는 흠칫 놀라 천장을 올려다봤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리며 소리를 냈고,
냉장고 쪽에서 기이한 전자음이 들렸다.
띠—띠—띠...
마치 조율되지 않은 신호음처럼 불쾌하게 울렸다.
진우는 조심스레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검은 그림자.
짧은 순간, 너무 짧아서 그 존재가 무엇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설마, 진짜 유령이냐.”
그는 웃으려 했지만 목이 말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의 손에는 차가운 땀이 배어 있었다.
그날 이후 진우는 알게 된다.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에는,
오랫동안 '잊힌 것들'이 모여 있는 장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곳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고,
지도에도 남아 있지 않으며,
이제는 '이계(異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진우.
그는 그 문 앞에 서 있는 첫 번째 '목격자'가 되어버렸다.
2화. 죽은 공간의 소리
고시원에 사는 진우는 과거 고시원 화재의 환영을 겪으며, 잊힌 기억을 목격하는 능력을 자각한다. 그는 이제 ‘기억을 보는 자’가 되었다. 서울은 과거를 지우는 데 능숙하다.재개발이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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